[신윤창소설] 인식의 싸움 29. 시장조사 업무(16)

“아니 말이야….”

한사장은 말을 꺼내려다가 열을 참지 못해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닫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좀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그는 의외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내가 신입사원에게 말해봐야 소용없겠지 하고, 아무 말 안 하려고 그랬는데 말이야~!”

한사장은 또 다시 말을 멈추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그간 참았던 불만들을 한 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담당 바뀌자 마자 이럴 수가 있나, 어? 내가 주문도 안 한 것이 아침부터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단 말이야. 오늘 물건 들어온 게 얼마인지 알아? 사람이 숨돌릴 시간을 줘야지,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찌 이리 밀어내고 지랄들이야? 내가 지난 번에 회사 들어가서 또 한번 밀어내면 식칼로 다 찔러 죽인다고 한 거 알아 몰라? 그런데도 또 밀어내? 네 놈이 죽고 싶어 환장한 거 아냐?”

“네? 아…, 저….”

상황파악이 잘 안된 나는 당장 뭐라 할 말을 잃었다. 단지 오늘 아침 장대리가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하던 중에, 지점장이 얼굴 한 구석 가득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 처음이라 고생 좀 할 꺼야’ 하면서 슬쩍 던진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그래, 신입사원인 당신이 뭘 알겠냐 만은, 본사에서 자꾸 이렇게 심하게 하면 나도 이 개똥같은 대리점 때려 치울테니, 회사 들어가면 당신 지점장에게 분명히 전달하라고! 알았어?”

한사장은 말하면서 제풀에 더욱 흥분됐는지 목소리가 점점 더 격앙되어 갔다. 그리고는 나머지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더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벌떡 일어서 훌쩍 밖으로 나가버렸다.

참담한 심정으로 대리점을 나온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지점장은 여직원을 시켜 나 몰래 마구잡이로 물건을 밀어 넣고, 담당자를 나로 바꾼 것이었다. 이 고약한 대리점 사장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꼬이기 시작하여 무척 오랜 기간 나는 이 대리점 사장 때문에 고역을 치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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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점장에 대한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난 신대리는 그 동안 생각하며 조금씩 준비했던 얘기를 강소장에게 모두 털어 놓았다. 그의 얘기는 모든 상황의 핵심을 찌르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강소장조차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그 동안 아무 일도 안 했다는 거야? 임마, 그건 업무적 배임 행위야. 이런 게 진작 됐으면 내가 이렇게 고생 안 해도 되잖아.”
강소장은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되는 듯이 말했다. 
“아니, 이건 나도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대책 안까지 생각한 거야. 그 동안은 나도 잘 몰라서 마케팅부터 차근차근 공부하고, 우리회사 마케팅 전략의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데 시간을 바칠 수 밖에 없었어.”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거야?”

“내 생각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야지. 이제부터는 이팀장 몰래, 나를 위한, 아니 진정으로 우리회사를 위한 다른 방향의 조사를 시작해야 해. 그렇게 하려면, 또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내 생각에 2개월 동안 별도로 조사하고 정리해서, 내년 1월 초면 계획서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

“좀 더 빨리 하면 안되겠니? 이미 다 준비되어 있다며? 이번 사업계획에 반영해야지 늦으면 나중에 힘들어져.”

강소장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신대리는 단호했다.

“이게 제대로 된 객관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면, 윗 사람들에게 힘으로 밀린다. 권력보다 강한 힘이 바로 팩트(Fact)를 바탕으로 한 로직이란 말이야. 더욱이 상대가 김상무와 이팀장이라면 꼼짝도 못할 정도로 더욱 완벽해야 해. 섣부르게 덤볐다가 죽도 밥도 되지 못할 수 있어. 그리고 나 혼자 하기에는 많이 벅찬 일이야. 네가 시간내서 도와 줄 수도 없잖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어디 한 번 작품 만들어봐라. 내가 무진장 밀어줄게.”

“그런데 벼랑 끝으로 내몰지는 말라. 벌써 떨어져 죽기는 싫다. 하하”
친구와의 만남은 언제나 유쾌하고 뭔가 통하는 게 있어서 좋다. 이제 신대리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신대리와 강소장은 오랜만에 회사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하여 힘찬 건배와 함께 밤을 지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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