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창소설] 인식의싸움 28. 시장조사 업무(15)

그래도 나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산재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늦도록 10개의 대리점 중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매일 방문하였다. 그렇게 회사에 복귀했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서 나만 혼자인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매일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외근 중에 발생했던 일을 정리하고, 주문 받았던 것을 전산에 입력하는 일을 마치고 나서야 퇴근하였다.

그렇게 집에 와서 어머니가 차려 준 밥을 먹을 때가 보통 10시였으니, 집에서 9시 뉴스를 본적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였다. 게다가 연로하신 어머니가 매일 밤 늦게 음식을 차려주시는 일도 내겐 큰 아픔이었다. 그래서 그 후 나는 간신히 어머니를 설득해서 서울을 벗어난 경기도 화정 쪽의 작은 오피스텔을 빌려 독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노력은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힘든 일만 시켜서 나를 내보내려고 했던 지점장의 의도와는 달리, 내가 맡았던 문제 대리점들의 매출이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회사에 버림받고 용산전자상가에서 제품을 사입해서 팔 던 곳들이 대부분이었던지라, 회사에서 매입하는 실적은 바닥을 친 곳들이나 다름없었으니 더 이상 떨어질 것도 없는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대리점 사장들이었다.

그러다 새로 바뀐 젊은 녀석 하나가 매일 정성을 다해 찾아간 노력에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 대리점 사장들은 점차 사입을 줄이고 젊은 담당자에게 주문을 늘이기 시작하였는데, 과거 워낙 적었던 실적이었던 것이라 금방 눈에 띄게 호전된 실적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더욱이 남들보다 많은 10개의 대리점이 아닌가?

그러자 지점장은 가장 건실해진 여의도대리점을 장대리에게 넘겨주며, 장대리와 감정적으로 대립된 말미대리점을 내게 맡기는 식으로 나에게 압박을 더욱 가해왔다. 시흥대로변의 말미고개라는 곳에 있는 말미대리점 사장은 몇 주 전 회사로 찾아 들어와 식칼을 뽑아대며 책상을 뒤엎고 또 다시 제품을 밀어내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아우성을 쳤던 사람이었다.

당시 담당 선배인 장대리는 오랜 베테랑이었지만, 모두가 다 아는 악명 높은 말미대리점 사장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말미대리점은 그래도 매출이 꽤 큰 곳이라 회사에서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어느 누구도 담당을 대신 맡고 싶어하지 않아했기 때문에, 결국 그 몫은 나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대리점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공터에서 20여 분을 서성거렸다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대리점을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

“안녕하세요!”

큰 소리로 인사를 했지만, 때마침 제품이 들어와서 전 직원들은 박스를 나르느라 여념이 없었는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잠시 머슥하니 어쩔 줄 모르고 서있던 나는 이내 윗 자켓을 벗고 함께 박스를 나르기 시작했다. 상당히 많은 제품이 들어와서 한 여름 무더위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제품을 나르며 자연스럽게 교환되었던 눈길이나 간단한 대화로 어느 사이 대리점 직원들과 처음의 서먹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박스를 모두 나르도록 대리점주인 한사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노동의 즐거움을 공유했던 그곳 영업부장을 통해 그는 말미 대리점의 상황과 한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눌 수가 있었다. 그런 사이에 사무실로 한사장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다시금 큰 소리로 인사했다.

“어~ 왔나?”

간단한 인사말을 던지며 한사장은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척 소파에 앉으며, 한동안 신문을 뒤척이고 나서야 마지못해 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좀 이리로 앉지”

여직원이 가져다 준 커피를 저으며 한사장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인상이 썩 좋지 않은 것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나는 간신히 내색하지 않고 한사장을 마주하며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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