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신대리는 민이사의 부름에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그 짧은 한마디 속에도 변함없는 민이사의 활기와 자신감을 느낀 신대리는 더욱 기가 죽는 것만 같았다. “찾으셨습니까?” 문가에서 쭈삣거리는 신대리를 보고 민이사는 말했다. “어! 신대리, 어서 와. 이리 와서 앉지 그래?” 신대리는 민이사 책상 앞 회의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문 앞에서 의자에 앉기까지의 극히 짧은 시간 동안임에도 불구하고 신대리의 심장은 더욱 요동치고 입술은 바짝 말라만 갔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신대리는 속으로 깊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신대리, 지난 번에 같이 어울리지 않고 그냥 그렇게 가서 좀 서운했어?” 의외로 다정스런 민이사의 말에 신대리는 뭐라 할말이 없어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내가 요즘 너무 경황이 없어서, 신대리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렇잖아도 사장님께서 신대리 얘기를 하며 예전에 신대리가 만들었던 보고서를 읽어보라고 주셨는데, 여태 못 읽었다가 오늘 아침에야 읽어보게 되었지 뭐야? 그런데 말이야….” 민이사는 잠시 말을 끊고는 머그컵에 가득
“네, 이사님, 저 그게…, 마케팅부 신대리입니다.” “어? 근데 오늘 왜 참석 안 했지? 저리 가서 함께 하지 그래?” “아닙니다. 일이 있어서 오늘은 좀…, 다음에 뵙겠습니다.” 신대리는 얼른 계산을 마치고 도망치듯이 뛰쳐나왔다.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어쩌지를 못하며 도망 나온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얼떨결에 따라 나온 김대리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 참에 민이사님이랑 같이 한잔 하며, 얼굴 도장도 확실하게 찍지 왜 도망 나와요?" “그러게, 김대리. 나도 잘 모르겠네. 내가 이팀장 때문에 점점 바보가 되가나 보다.” 김대리는 뭐라고 한말 더하려다 신대리의 표정을 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을 참고 말했다. “그럼, 어디 다른데 가서 한잔 더할까요?” “아냐, 오늘은 그만 집에 갈래. 내일 보자.” 신대리의 심각한 표정에 김대리도 알았다는 듯이 그를 더 이상 잡지 않고 발길을 돌리려다 다시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신대리님, 지난 번 제게 말씀 하신 것 있죠? 거~ 외~, 만천과해(瞞天過海)란 말이요. 저는 신대리님 했던 그 말이 꽤 인상 깊어서 인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만천과해~! 꼭 잊지 마세요. 오늘은 이만
갓 인쇄되어 나온 따뜻한 종이 한 다발을 가지런히 철한 후, 신대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엄청난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벌써 밤 9시가 넘었다. 안산의 금형 거래선을 방문하고 사무실에 들어온 때가 오후 7시였다. 사무실은 오늘따라 모두 일찍 퇴근했는지 아무도 보이지가 않았다. 오늘에야 말로 꼭 브랜드숍 런칭 품의서를 끝내고 말겠다는 욕심에 저녁 식사도 거른 채 너무 일에 몰두했나 보다. 그리고 마침내 신대리는 책상 위에 품의서와 각종 첨부문서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을 대견스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 하나를 드디어 끝냈다는 기쁨보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처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제 런칭 품의도 다 끝났는데, 이팀장의 결제를 받아야만 하니….’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그때 고요한 적막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함께 안산에 다녀온 김대리였다. “아직 안 들어 가셨어요?” “응, 런칭 품의서를 마무리 하느라고, 그런 김대리는 왜 여태 있어?” 신대리는 그간 협력업체를 함께 다니며 김대리와 매우 친해져서 세살 터울인 그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었다. “저도 들어와서 일 좀 정
“안녕하십니까? 마케터 여러분! 오늘 근 5년 만에 다시 우리회사에 돌아오게 되어서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과 함께 근무하게 되어 대단히 기쁘고, 앞으로 할 일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어 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과거 나와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도 있어서 알겠지만, 그 때만해도 우리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강력한 일등 브랜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일등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급변하는 시장환경 속에서 이제는 일등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시대가 왔으며, 이에 빠른 대응을 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이 시간부터라도 당장 변해야 합니다. 따라서 나는 지금부터라도 당장 일등을 할 수 있는 전략만을 구사할 것입니다. 비록 회사 전체 규모로 볼 때 대기업인 경쟁사들을 이기고 일등이 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세분시장 내에서는 우리가 일등을 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나를 믿고 따라 온다면,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실패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을 탓하는 일 또한 절대 없을 것을 약속 드리며 짧게나마 인사말을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각 팀별 업무 보고를 일주
신대리는 포장개발팀 김대리의 도움으로 전반적인 신제품 개발과정과 절차에 대해 알 수는 있었으나, 주로 포장재 개발에 치우치다 보니 역시 BM의 도움 없이는 일이 여전히 힘들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소했던 포장재에 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만 하더라도 지금으로선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그 동안 플라스틱은 다 똑 같은 플라스틱인 줄만 알았는데, 거기에도 ABS, AS, PE, PET, PVC 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그 쓰임새가 용기의 디자인 및 특성에 따라 모두 다르게 적용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포장개발팀을 비롯하여 R&D 및 디자인팀이 신제품 개발을 착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제품 런칭(Launching) 계획 품의”를 작성하여 CEO의 결재를 받아야만 비로소 일이 진행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신대리는 마케팅에 와서 2주간 다른 BM들이 해왔던 과거 품의서 자료를 봐왔기 때문에 런칭 품의서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작년에 사업개발팀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만들었던 M&C 사업계획서를 더욱 구체화하여 실행 계획(Acti
포장개발팀에서는 디자인팀에서 제시한 목업(Mock-up)을 바탕으로 제품과 금형(Mold)을 설계하는데, 이때 그 디자인이 양산(Mass Production)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발견하였고 이에 따른 개발의 문제점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디자인은 촉박한 출시 일정이라는 이유로 수정 없이 최종 결정되어 그대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협력업체를 통해 금형을 개발하고 포장재를 생산, 구매함에 있어서 아미앙떼 디자인을 바로 소화할 수 있는 업체는 결국 디자인 초기 단계에서 이미 관여했던 유일한 A 업체뿐이었다. 자재 구매팀은 기본적으로 거래선을 다원화해서 유사 시의 위험을 분산시키는 한편, 거래선 간 경쟁을 통해 품질을 향상시키고, 구매단가를 떨어뜨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디자인에서 진행했던 A 거래선으로만 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케팅 BM의 조율 및 의사결정이다. BM은 각 개발 관련 팀의 의견을 수렴해서 우수한 상품이 나올 수 있도록 매번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 BM이 기본적으로 포장재 개발 과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며, 또한 포장재 관련 업무는
그렇게 또 한 순배 술을 돌리고 나자 포장개발팀의 김대리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근데, 오늘 신대리님을 만나자고 한 것은 과거 일을 얘기하자고 그런 것은 아니고요, M&C 브랜드 계약이 완료되었다고 하는데, 제품 개발은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저희가 당부드릴 것도 있어서 입니다.” 김대리는 약간 코맹맹이 목소리에 느릿한 말투가 사투리는 쓰지 않았지만, 마치 ‘나는 충청도 출신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아니나 다를까, 충청도 대천 출신으로 부모님이 논밭 팔아 공부시켜 간신히 회사에 취직했다고 우스개 소리도 하는, 이제 갖 대리가 된 신대리보다 3살 아래의 후배였다. 그는 포장재를 개발함에 있어, 제품설계와 금형개발 거래선을 연결하고, 그 과정에 개발된 포장재 거래선을 자재구매팀에 연결시켜주는 한편, 최종적으로 생산에 포장재가 입고되면 공장 품질관리팀에서 제대로 QC(Quality Control)를 할 수 있도록 표준견본을 잡아주는 포장개발의 총체적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신대리는 오기 전부터 오늘 만남의 목적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드디어 자신이 바랬던 주제가 나오자 내심 기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감자탕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신대리는 뒷 골목 감자탕집을 항상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지, 문을 열고 들어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랴부랴 서둘러 나왔지만, 이른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좁은 감자탕집은 이미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신대리는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가 없어서, 들어서자 마자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길 바라면서 일부러 사람을 찾는다는 듯이 크게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 때 기둥 옆 모퉁이에서 신대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대리님, 여깁니다.” 신대리는 무의식적으로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인사를 하였다.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그는 솔직히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 조차 궁금하였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마케팅부에 온 신대리입니다. 반갑습니다.” 지금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약간은 미안함과 두려운 마음을 갖고 신대리는 조심스럽게 인사하였다.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포장개발팀의 박과장입니다. 먼저 제가 우리 쪽 사람들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이쪽은 저랑 같이 근무하고 있는 포장개발팀의 김대리, 심대리이시고, 그리고 이쪽은 자재팀의 박대리이십니다.” 박과장은 직장생활에 어울리지 않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