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오전, 신팀장은 이태리 메이크업 전문 제조회사인 인터코스를 방문해 올 해의 세계 칼러 트렌드를 프레젠테이션 받고, 다양한 샘플을 보고 발라보면서 정대리, 남대리와 함께 주요 색상의 견본을 결정하였다. 이 견본을 토대로 첫 출시될 립스틱과 아이섀도우 등의 다양한 칼러가 준비될 것이다. 그리고 오후에 방문한 곳은 각종 에스테틱 전문 브랜드들의 전시관들이었다. 신팀장은 이곳에서 앞으로 나올 기초화장품의 아이디어와 콘셉트를 찾기 위해 각 부스를 돌아 다니며 제품을 둘러 보았다. 화장품에 대해 아직 전문성이 부족한 신팀장은 들고 다니기가 힘들 정도로 각종 카타로그를 무조건 열심히 모았다. 그는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여러 사람들이 검토하면, 이중에 뭐라도 하나 참신한 아이디어가 걸리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컸었다. 그러나 하루를 마감하는 정보 공유 미팅에서, 팔이 빠지도록 가져온 그의 수 많은 카타로그들은 중복되고 불필요한 것들로 분류되고 걸러져서 거의 반이나 버리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갑자기 수북이 버려진 카타로그 뭉치들이 하루종일 메고 다녔던 어깨의 통증으로 느껴졌다. 그런 아쉬움과 함께 볼로냐 코스모프로프의 마지막 밤도 저물어갔다.
매년 봄이면 화장품업계에 매우 중요한 세계적인 전시회가 이태리 볼로냐에서 열린다. 볼로냐 코스모프로프 페어(Cosmoprof Fair)는 전 세계 화장품 관련 원료, 부자재를 비롯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용에 관련된 모든 것이 전시되는 대단한 규모의 미용박람회이다. 물론 유명 명품 브랜드들의 전시관은 없지만, 그런 명품 브랜드들에 납품된 우수한 기술(원료)과 포장재 및 각종 디자인을 만날 수 있으며, 명품과는 달리 쉽게 만날 수 없는 각 나라의 참신하고 아이디어 넘치는 제품들을 접하면서 신제품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 및 컨셉적 방향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래서 주로 마케팅, 디자인, R&D, 포장개발 쪽의 팀장들은 매년 코스모프로프에 직원 한 두 명을 데리고 참관을 해왔다. 이번 코스모프로프의 참석자는 민이사를 포함하여 대부분 M&C TFT 멤버들이 각 부서 대표로 선정되어, 일주일간 이태리를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신팀장은 이번 기회에 파리에 있는 미셀리에게 전화를 하여 이태리를 다녀 가는 길에 파리에서 M&C 본사와 미팅을 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신팀장은 이미 M&C 디자인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 컨펌 받은
봄이 왔어도 여전히 추위가 기승을 부리며, 새봄을 시샘하는 듯 꽃샘추위가 가실 줄 모르는 3월 초의 어느 날 한 명의 아리따운 여직원이 인사를 하러 왔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미용연구실에 새로 입사한 정대리 입니다. 앞으로 많은 도움 및 부탁 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녀의 인사는 틀에 박힌 말이었지만 매우 활기차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정대리는 이미 결혼한 30대초반의 유부녀였지만, 미용연구실 직원답게 짙은 화장과 세련된 복장으로 작은 키와 통통한 몸매를 티가 안나게 커버하였으며, 눈이 크고 또렷한 이목구비를 짧은 단발 헤어 스타일로 더욱 부각시킨 것이 뭔가 메이크업 쪽으로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확 들어왔다. 그녀는 이미 타사에서 많은 품평 및 상품 기획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색조제품에서 중요한 칼라 및 트렌드에 밝아 그 동안 기초화장품 중심인 미용연구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특별히 M&C를 위해 영입한 인재였다. 화장품 개발에서 R&D만큼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미용연구이다. 미용연구는 말 그대로 미용을 R&D하는 곳이다. R&D가 기술적인 측면에 치우쳐서 화장품의 최신 기술 및 원료를 찾고 개
“그런데, 한 가지 의견이 더 있습니다.” 신팀장은 디자인이 결정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영진이 떠나기 전에 얼른 일어서며 말을 했다. “지난 번 사업개발부에서 소비자 조사했을 때는 디자인이 없이 진행하다 보니, 제품과 브랜드의 연결이 안된 상태에서 기 형성된 M&C의 브랜드 이미지만으로 조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더 명확한 타겟과 컨셉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M&C 브랜드와 함께 이 디자인을 보여주며 FGI(Focus Group Interview)를 한번 하고 싶습니다. 이 것이 검증되지 않으면 일을 진행하면서도 이것이 과연 바른 길인지 왠지 꺼림칙해서 자신 있는 일이 진행될 것 같지 않습니다.” 신팀장의 제안에 민이사가 거들었다.“좋은 생각입니다. 사장님! 이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입니다. 신팀장, 조사 때문에 런칭이 지연되진 않겠지?”“네, 이사님. 다른 일에 방해되지 않게 병행해서 함께 수행해 나가겠습니다.” 민이사의 도움에 신팀장은 대표이사의 허락을 받고 지난 번 정량조사를 실시했던 D사의 엄대리와 다시 함께 조사를 하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지난 조사를 통해 브랜드를 누구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엄대
한 달이 지나 드디어 M&C색조 디자인이 나왔다. 처음 봤었던 스케치와는 달리 기대 이상으로 매우 감각적인 실버 메탈릭 디자인이 나왔다. 목업은 원형과 정사각형으로 두 가지 안이 나왔는데, 신팀장은 원형이 더욱 슬림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들었지만, TFT 멤버들의 의견은 각각 반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신팀장은 긴급 제안을 하였다. “자, 우리 이렇게 합시다. 우리끼리 떠들어대지 말고 소비자 조사를 해봅시다. 서대리 목업은 몇 개씩 만들었죠?”“시간에 쫒겨 이거 각 한 개씩 만드는 것도 간신히 했어요.”“한 세트만 더 빨리 만들 수 있나요?”“2주는 시간을 주셔야 합니다. 더 당길 수는 없어요.” “그러기엔 우리가 너무 급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사각형 디자인 한 세트와 원형 디자인 한 세트를 각각 하드보드 지에 붙여서 2인1조로 해서 2개 조가 매일 거리에 나갑시다. 내일 한 조는 오전에 패션거리인 압구정과 강남으로 가고, 한 조는 대학가를 대표하는 신촌과 홍대로 갑니다. 그리고 각 조는 오후에 지역을 바꿔 각 지역에서 최소한 100명, 두 지역에서 총 200명에게 선호도 조사를 하십시오. 또 다음
“이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신팀장은 조윤희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조윤희는 사업개발부의 인재로서 불어와 영어에 능통하고 적극적이며 스마트한 직원이라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하였다. “그런데 사업개발부도 매우 중요한 부서인데…, 송팀장도 그렇고…, 게다가 신팀장이 있었던 곳 아닌가?” 민이사는 해외파인 송팀장을 잘 보고 있었던 터라, 사뭇 주저하는 눈치였다. 신팀장은 안되겠다는 듯이 단호히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송팀장과의 관계 때문에 조윤희씨가 그만 두려고 합니다. 이 부분은 개인적인 문제라서 제가 이사님께 자세히 말씀은 드릴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우리회사는 조윤희씨 같은 인재를 놓치면 안됩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꼭 잡아야 합니다, 이사님.” 신팀장은 차마 송팀장에 대해 자세히 얘기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윤희를 잡아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은 충분히 전달하려 노력하였다. 마침내 민이사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네. 뭐가 되었든 그런 인재가 회사를 떠나면 않되지. 내가 오후에 송팀장을 만나 볼 테니, 기다려 보게나!” 신팀장은 고개 숙여 크게 인사하며 고마움을 표하고 자리로 돌아가 이내 일 속에
신팀장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마냥 놀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윤희를 회의실로 데려 갔다. 회의 실에 들어오자 조윤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잘 아시잖아요. 사업개발부에 있을 때부터 송팀장님 때문에 저 힘들어 했던 거요. 이젠 도저히 안되겠어요. 그냥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어요. 그래서 미리 인사도 할 겸 찾아왔었던 것인데, 진짜 이른 아침 시간 아니면 얼굴보기 힘드시네요.” 이미 조윤희는 마음의 정리를 다한 사람처럼 보였다. “윤희씨! 뭔 소리야? 그만 두면 안되지.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M&C 브랜드를 들여왔는데, 윤희씨가 결실도 맺기 전에 떠나면 안되지.” 신팀장은 순간 ‘앗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여지 것 조윤희를 잊고 있었을까? 기초 담당자를 계속 마케팅 부서 내부에서만 고민했었는데, 조윤희를 전혀 생각조차도 못했던 것이다. 작년 조윤희와 깊은 포옹을 했을 때 떨리던 감정의 끝자락이 다시 새롭게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신팀장도 자기도 모르게 쏠리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조윤희를 무의식적으로 잊으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언젠가 윤희씨랑 성준이는 나랑 다시 꼭 일할 거라고 말했잖
TFT는 소강 상태였다. 이제는 모두 각 자의 부서에서 디자인하고 R&D에 집중할 때였다. 다소 여유를 찾은 듯 보였지만 신팀장에겐 떠나지 않는 화두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이 많은 제품들을 허진희와 단 둘이서 진행해 나갈 수가 없어 마케터의 보강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브랜드숍 매장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느 곳에 매장을 오픈해야할지 등의 업무를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제품 디자인만 해왔던 회사의 디자인실에서도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어 전문적으로 숍 비지니스를 했던 경력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마케터 보강은 민이사에게 진작부터 요청한 바 있었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도대체 내부조직에서는 마땅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고, 점포개발 경력자 채용에 대해서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는 이유로 증원이 보류되어 신팀장은 그저 답답하기가 그지 없었다. 그렇게 1월이 지나고 2월의 추위가 마지막 겨울을 아쉽다는 듯이 기승을 부리던 날 아침, 신팀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남들보다 이른 아침을 시작하였다. 평소와는 달리 신팀장의 자리에는 따뜻한 커피가 추위에 얼은 그를 반기며 향긋하고 구수한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어? 이게 웬 커